4.3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
제주도는 한반도 남단의 섬이다. 제주도는 섬이라는 조건과 자연적 조건과의 투쟁만큼이나 역사적으로도 반도와는 다른 특유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를 갖는 공동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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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특징
하나의 역사적
제주도 사건 종합보고서’를 보더라도 앞에서 말한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당시 상황을 초기에 파악하고 현명하게 처리하였다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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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역사적 의미
제주4
4.3 담론 등에 더 의존하고 있었다.
2세대와 3세대를 포함하는 제주주민의 4.3사건에 대한 기억방식은 의견형, 원인분석형, 사례형, 가해피해론, 희생론, 역사평가형, 과정형, 이념.대립형으로 나뉘었다.
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배경
1947년에 들어서면서 미 군정은 철도노조파업, 정판사사
제주4.3 당시 선포된 계엄이 불법이었는지 여부와 중산간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 방화나 집단학살극이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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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항쟁(제주43사건)의 역사적 배경
제주4.3은 한마디로 미군정 아래에서 한민족이 안고 있는 집약적 모순이 빚어낸 역사적인
한다.
이처럼 신체의 자유에 대한 절차적 보장과 관련된 헌법상의 제 원칙과 규정들에 비추어 본다면 제주4‧3 수형자 명부에서 기록된 사람들은 이른바 폭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재판을 받을 권리가 희생된 자의 명부라 할 것이다. 아니 국가 공권력의 피해자 명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을 향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4월 3일 이후로 수년간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충돌이 있었고, 1948년 말에 시작된 소위 ‘초토화작전’에 의해 수많은 양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는 참극(慘劇)이 벌어졌다.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사령관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를 설치하는 한편, 본토 경찰 1,700명의 제주 파병을 승인하였다. 또한 서청 단원 500명을 증파했다. 그런데 응원경찰 등에 의한 토벌작전은 오히려 민심을 자극, 많은 도민들을 산 속으로 피신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 동안
45. 9. 18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68:10). 또 18일에는 미군의 각 국장임명이 발표되는 등 109명의 장교가 군정시행과 동시에 각기 직무에 임명되었다. 다만 이들 미군정장교단원들은 전선에서 차출되어 한국의 실정이나 각자의 행정 직무에 관하여 사전의 지식이나 준비도 갖추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상황도 타 지역과 비슷해서, 1922년 12월 15일부터 제주-오사카 간 직항로가 개설되자 많은 도민들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기록에는 1934년 오사카 거주 제주인의 수가 5만 45명(남: 29,365명, 여:20,688명)이라고 나와 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4(당시 제주도 총 세대수 47,466호, 1세대당 1.1명
제주도는 다시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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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주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본격화된 제주도민중항쟁을 살핌에 있어 소박한 수준이지만 당시의 직업구성을 중심으로 행위주체가 어떻게 조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항